최장순 엘레멘트컴퍼니 대표
“브랜드가 무조건 선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소수를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키면서까지 물건을 팔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최장순 엘레멘트컴퍼니 대표의 브랜딩 철학이다. 최 대표는 구찌, CJ, 크래프톤 등 수많은 브랜드의 컨설팅을 지휘해 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기업 브랜딩의 최전선에 머물고 있지만, ‘브랜드의 책임’에 대한 생각을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최근 내놓은 신간 <일상의 빈칸>에서는 일상을 사는 누구나 자신만의 시각으로 기획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작은 용기를 북돋는다. 그와의 인터뷰는 ‘가장 매력 있는 비즈니스 휴머니스트’라는 엘레멘트컴퍼니의 비전을 닮았다.
최근 신간 <일상의 빈칸>를 내셨죠.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집필했나요.
“삶에 애착을 갖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획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에요. 일상에서도 인문학적인 상상력과 기획력을 연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똑같은 일상 속 사물을 평생 동안 봤다고 하더라도 관점이 달라지면 새롭게 보입니다. 세계를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생활 감각을 찾는 방법 중, 제 방식을 하나 알려 드린 거죠. 각자의 삶에 응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원고 집필은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책은 평소에 휴대전화 카메로 찍어 둔 사진을 바탕으로 구상했습니다. 휴대전화 사진첩에 담긴 사진을 나열하고 재배치하면서, 집필할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이후 초고를 본격적으로 집필하는 기간은 1~2주 정도가 걸렸죠. 물론 원고 내용을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분석해보고 싶은 방향이 있거나, 더 찾아보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때 주로 사진으로 남겨 두거든요. 가끔 어떤 사진은 왜 찍었는지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어서, 메모장 애플리케이션에 옮긴 뒤 밑에 해시태그를 달아 놓기도 해요.”
사진으로 기록하는 게 독특하게 느껴지는데, 따로 텍스트로 기록하진 않나요.
“예전에는 수첩에 자필로 기록했어요. 과거에 기자 생활을 했는데, 기자수첩이 이만큼 쌓일 정도로 많이 썼죠. 그런데 지금은 기록해 놓은 걸 다시 들춰보는 과정에서 시간이 너무 낭비된다고 느껴요. 업무적으로 대화할 때는 전체적인 맥락을 동료가 기록해주고, 저는 인사이트가 될 만한 중요한 단어나 생각을 태블릿PC에 간단하게 메모하는 정도만 하죠. 이렇게 메모하는 이유는 다른 동료가 기록한 내용을 다시 안 찾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시간이 너무 없으니까.”
책에서 ‘일상을 클래식이 아니라 재즈처럼 생각해보자’고 제안하셨죠. 어떤 방법으로 일상을 변주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지하철 타는 걸 좋아했어요. 퇴근할 때 지하철을 매일 다른 호선으로 조합해 갈아탔어요. 몸이 아프거나 동행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했는데요. 갈아타는 지하철 노선마다 승객 옷차림이나 분위기가 달라요. 학교를 거쳐가는 노선이 있는가 하면, 승객들이 종사하는 업종도 노선마다 다르죠. 지역마다 소득 수준이 다르니 분위기도 조금 차이가 있고요. 이런 게 변주예요.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매일 달라지는 걸 지켜보는 거죠.” 작가 소개 중 ‘브랜드는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말이 인상적이던데요.
“사실은 제가 10년 동안 하고 있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듣는 분들은 ‘네가 철학 공부해서 그래’, ‘이상적인 얘기하지 마라’라는 반응을 보이거든요. 그런데 이 문제는 갈수록 단순한 산수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업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는 과정에는 소비자의 구매와 투자가 존재하거든요. 높아진 기업 크레더빌리티(credibility·신뢰성) 덕에 금융 회사 이자율도 상대적으로 저렴할 테고, 정권에 따라 규제 완화 혜택도 받습니다. 원초적으로 말하면, ‘브랜드가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너희, 우리 돈 투자 받은 거야’라는 맥락이죠. 그래서 저는 브랜드를 컨설팅할 때 가급적이면 소비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메시지를 심으려고 하고 있어요. 공동체의 덕목을 망칠 만한 어휘나 디자인은 쓰지 않으려고 하고요. 제가 회사를 운영하며 지키려고 하는 철학 중 하나죠.”
최근 몇 년 사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을 고민하는 기업이 많아진 것 같은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사실 기업들이 ESG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물론 결과가 긍정적이면 좋죠. 그런데 동기도 중요하잖아요. 제가 기억하기로 ESG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게 2005년경이에요. 유엔환경계획(UNEP)이 화두를 던졌는데, 그때는 기업인들이 콧방귀도 안 뀌었죠. 그러다 2018년쯤 미국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 ESG에 신경을 안 쓰는 기업에는 투자를 철회한다고 밝힌 거죠. 그때부터 난리가 났습니다. 그럼 2005년에 이미 나왔던 ESG 이슈를 왜 지금 신경쓰려고 할까요. 결국은 규제 때문이거든요. 탄소세 같은 것들이 법제화되기 시작하면서, ESG를 챙기지 않으면 투자 대비 수익(ROI)이 안 나오는 상황이 된 거예요. 소비자가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두려움도 있겠고요. 기업이 말하는 지속가능성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ROI 지속가능성입니다. 물론 기업 내에도 ESG에 진정성을 갖고 움직이는 개인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조직은 절대로 진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요. 그래서 끊임없이 견제해줘야 하고요.”
브랜드가 공동체에 기여한 사례를 꼽는다면.
“파타고니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친환경 제품 공정, 공정무역 등을 실천하고 있고, 철학적으로도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사실 거창하게 인문학적인 수사법을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재화를 만들어 공동체에 기여하는 모든 기업은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좀 더 좋은 메시지를 팔면 좋겠다는 바람인 거죠.”
브랜딩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해지는데요.
“언어학 전공자를 채용하는 기업을 찾고 있었는데, 선배가 브랜딩 컴퍼니를 소개해준 거예요.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찾아갔는데, ‘네이머(namer)’를 모집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이쪽 일을 시작하게 됐죠. 회사에 들어간 뒤 데이비드 아커 교수(브랜드계 석학)의 책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조금씩 브랜드의 맥락과 자본의 논리를 배웠죠.”
자본의 논리를 배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주니어 시절에 디즈니 디자인 작업을 총괄했던 분이 한국에 방문해서 아이디어 회의하는 모습을 보게 됐는데요. 그때 제 눈에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그래서 쉬는 시간에 ‘당신처럼 콘셉트를 잘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했어요. 그랬더니 ‘돈을 만드는 프로세스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기업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파이프라인을 이해하면 콘셉트를 잘 잡을 수 있다는 말이었죠. 그때부터 비즈니스에 대한 스터디를 하기 시작했어요. 여전히 자본가에 대해 많이는 모르지만, 과거에 비해 더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됐어요. 자본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브랜딩에 필요한 전략적 사고를 가질 수 없거든요.”
옳고 그름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개인적으로 원하는 시장 트렌드의 방향이 있나요.
“제가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인테그리티(integrity)’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번역하기 조금 애매한 단어이긴 한데, 말하자면 ‘진실성’이죠. 도덕주의를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브랜드를 하는 사람이니까 브랜드 얘기로 다시 들어가면, 소비자도 브랜드가 전하는 키워드를 만족스럽게 느껴야 해요. 얼마 전 한 아파트 광고에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서 논란이 많았던 것 기억하시나요. 물론 우리나라에 이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겠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찐팬(진짜 팬)’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그런 문구를 썼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문구는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공동체를 해치는 언어거든요. 브랜드 인테그리티가 없는 거죠. 브랜드가 무조건 선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소수를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키면서까지 물건을 팔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방향이 시장의 트렌드가 됐으면 좋겠고요.”
글 정초원 기자 ccw@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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